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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부모모임

인터뷰

[심층인터뷰] 논바이너리 트랜스 맨 자식을 둔 어머니 - 나미

나미님은 논바이너리 트랜스 맨(Non-binary Trans Man)자식을 둔 어머니입니다. 딸이 결혼해서 아이도 키우고 직장도 다니는 것을 꿈꿨던 나미님은 1년 반 전에 아이의 커밍아웃을 경험했습니다. 딸인 줄 알고 여태껏 키운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힘든 것도 많았지만, 아이의 트랜지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모임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나미님은, 스스로를 부모모임의 치유력을 가장 크게 경험한 모범케이스라고 지칭합니다.

 

인터뷰 한 사람 / 어나더

인터뷰 한 날짜 / 201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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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여러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내가 이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많이 했고 또 그 방법이 우리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 제가 뭐라고 했냐면 우리나라 기독교 사람들 큰일 났다고 했어요. 앞으로 그들이 밀고 가다가 10년 후 20년 후에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소수자 권리가 보장될 때 이제 그들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어나더 / 자기소개 짧게 부탁드릴게요.

 

나미 / 저는 둘째가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한 1년 반 공부한 나미라는 사람입니다.

 

 

 

1. 커밍아웃 이전

 

어나더 / 자녀분이 성소수자라는 걸 아시기 전에 성소수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나미 / 그냥 성소수자를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고 얘길 통해 듣는다던지 뉴스로 접했을 때 왜 저렇게 까지 하나, 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냥 기본적으로 남자 여자가 애기 낳고 잘 살고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뭐 이런 기존의 틀 안에서 교육이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니다 하고 생각했었죠.

 

어나더 / 그런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로 표현하신 적이 있으세요?

 

나미 / 식구들끼리 그랬어요. 애들 앞에서도 했을 거 같아요. 남편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눴던 건 확실히 기억해요. 우리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어나더 / 홍석천씨나 하리수씨처럼 미디어에 노출된 모습도 보셨겠네요? 어떠셨어요?

 

나미 / TV에 나온 모습을 봤을 때는 거부감 같은 게 있었어요. 편하게 보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채널을 돌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왜 그렇게 살까’ 라고는 생각했죠. 뭐 나쁜 사람이다, 없어져야 할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자기 삶은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어나더 / 자녀분이 어리셨을 때는 어떠셨어요?

 

나미 / 큰 애가 동생을 낳아달라고 많이 조르기도 했고 평소에 딸을 키우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8살 터울로 둘째를 낳았는데 딸이어서 굉장히 기뻤어요. 그래서 알콩달콩 잘 키웠어요. 그 당시에도 ‘좀 그러네.’ 하고 느꼈던 것들이 몇 개 있었어요. 아이가 커밍아웃 하기 전에도 저한테 이야기 했던 건데, 애들이 보통 애니메이션을 보잖아요. 그럴 때, 공주 이야기 같은 걸 안 봐요. 뭐, 라이온 킹이나 정글북이라던가, 토이 스토리는 반복해서 봤는데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놀이를 한다고 해도 자기가 라이온 킹이 된다던가 뭐 이런 식이었고 또 오빠랑 사이도 굉장히 좋아서, 나이 차이도 많이 나니까, 키우다시피 했는데 칼 싸움을 같이 즐겨하기도 했고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옷 가게에 옷을 사러 가면 가기 싫어하는 것도 물론이고 옷을 입어보는 것도 싫어했고 한 두 번 보면 그냥 가자고 했어요. 여자 옷 같은 데에 관심이 없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남자애들이랑 막 뛰어 놀다가 헉헉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고학년 때는 서클을 만든다고 했어요. 뭐 철봉이나 줄넘기 같은 걸 하는. 근데 그 서클이 여자애들 대상이어서 그랬는지 몇 명 안 모여서 잘 안됐었어요. 고학년 때부터 표가 난 거는 남자 애들이 같이 어울려 놀아주지 않았고 여자 애들이랑은 관심사가 달라서 교우관계에 힘들어 했어요. 그 다음 고등학교 와서는 교복을 맞추는데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겠다고 해서 바지를 입고 다녔어요. 3년 내내. 학교 행사 있을 때만 스커트를 입었어요. 그게 지금 지나서 보니까 다 신호였더라구요. 근데 그 때는 자기도 몰랐을 때거든요. 자기도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편했던 거죠. 자기 속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건데 기존 여자애들이 평소 하고 다니는 거랑은 달랐던 거죠.

 

어나더 / 저번에 이야기 들어보니까 자녀분이 어렸을 때에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나미 / 네. 애 낳아서 잘 키우는 꿈이 있었어요. 첫째랑 둘째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까 제가 집에서 굉장히 재미있게 놀아줬어요. 집에서 게임을 하면서 영어, 일본어도 배우고 책 읽고 얘기 나누는 거, 이런 것을 서로 깔깔거리면서 했기 때문에 좀 그런 꿈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애를 낳아서 이렇게 재미있게 키워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어나더 / 혹시 최근에 이런 얘길 나눠보신 적이 있으세요?

 

나미 / 최근은 아닌데 ‘예전엔 네가 그랬었지’ 하면서 얘기를 하면 ‘그냥 그 때는 몰라서 그랬지’ 해요. 근데 그런걸 보고서는 제가 세뇌를 시켰어요. ‘너는 공부를 해서 네가 하고 싶은 것으로 직업을 가져서 사회생활을 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애는 내가 키워줄게, 걱정 마.’ 그래서 애가 앞으로 뭐하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 꿈도 갖고 계획도 갖게 만들었어요. 전 그런 가정을 꾸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지만 제가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서 직업은 가졌으면 했거든요.

 

 

 

2. 커밍아웃 / 아웃팅

 

어나더 / 1년 반 정도 전에 커밍아웃을 처음 하셨다고 했는데, 그 때 당시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미 / 그쯤 머리를 짧게 잘랐었어요. 그러면서 그 때 대학교 2학년 중간쯤 되어서 자기가 좀 뭐가 다르다. 자기 안의 욕구와 현재 처해있는 위치와의 차이를 느끼고 글이나 성소수자 뉴스를 접하면서 하나씩 표출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긴 머리가 예쁘다고 주위에서 얘기하고 저도 긴 머리가 더 예쁘다고 하면서 ‘머리를 기르면 되겠네.’하니까 “이제 머리 기를 일은 없을 거예요.”하고 말하더라고요. 그 때가 어느 정도 느꼈을 때인 거 같아요. 2학년이 끝날 때쯤 휴학을 하고 싶다고 했고요 그 때 본격적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현실을 알아가고 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세세한 얘기는 안 해줬지만 “전 남자 같아요.” 하고 말은 했거든요. 그게 1년 반쯤 됐죠. 그 때는 본인이 이렇구나,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고민 때문에 휴학을 해달라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3학년을 다녔는데 다니던 중에 10키로가 빠지고 과제도 제출을 못 하더라고요, 따라가질 못하니까요. 그래서 학기말을 몇 주 남기고 휴학을 했죠. 지금은 복학을 했는데 휴학을 했던 시간이 본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던 거 같고 부모한테도 가장 힘들었을 때였던 거 같아요. 본인이 트랜지션을 원한다고 얘기를 했고 그래서 작년 9월부터 호르몬 주사 맞을 준비를 했어요. 정신과에서 진단 받고 피검사 받고, 그러니까 본인 계획에는 9월부터 시작하면 복학 이후에는 어느 정도 남성화 되어있고 남자 같은 모습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 때 반대라면 반대인데 더 생각해보라고 한다던 지 “너에 대해서 더 알아볼게.” 해서 9월에 부모모임을 처음 나가게 된 거구요. 나가기 전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가자마자 ‘얜 좀 다르구나, 트랜스젠더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본인이 행복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사는 게 자기한테도 더 행복하겠구나 하는 판단 하에 완전 적극 지지했고요. 호르몬 병원에도 같이 가서 의사도 같이 보고 그랬습니다.

 

어나더 / 그러면 자녀분이 하루아침에 탁 던진 게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서 천천히 커밍아웃을 하신 건가요?

 

나미 / 네 그렇죠. 본인이 그렇게 느껴서 ‘내가 이래요’ 할 때는 그 과정을 얘기해줬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 중에 남편이 “좀 참아라. 이때껏 살아왔던 것처럼 좀 견뎌라. 그리고 목표가 공부해서 연구하는 것이 희망이니까 자리를 잡고 나서 마음대로 해라. 다 알리고 트랜지션을 거치고 해라. 그게 더 유리하다. 어떻게 사람들 시선을 견디겠느냐?”계속 그러니까 호르몬 치료에 대해서 얘길 안 하더라고요. 말을 꺼내봤자 반대를 하겠다는 생각에. 본인이 나름대로 상처를 받았던 거 같아요. 조금 후회도 돼요.

 

어나더 / 단번에 바로 내가 이렇다고 얘기한 건 아니지만 그 전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전까지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미 / 못했던 건 아닌 거 같아요. 자기가 느끼는 대로 다 얘기를 해줬는데, ‘이런 게 낫겠다.’면서 부모가 옆에서 해주는 게 자기 생각이랑 다르니까 호르몬 치료에 대해서는 상의를 안 거치고 진행한 거 같아요. 그리고 본인이 깨닫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렸어요.

 

어나더 /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커밍아웃 하는 좋은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나미 / 제가 제일 잘 아는 건 우리 집 이야기잖아요. 근데 가정마다 커밍아웃 시기가 다를 거고 부모의 종교도 다 다르기 때문에 상황마다 차이가 클 거 같아요. 그래도 어쨌든 당사자는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는 거구요. 부모라면 처음에 힘들던 반대를 하던 시간이 짧던 길던 공부를 하고 그것에 대해 받아들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반대하고 안 되는 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되거든요. 성소수자 분이 어리면 자기가 처한 상태만으로도 감당이 어렵기 때문에 부모를 챙길 여력이 없을 것 같아요. 근데 우리 애는 21살쯤 얘기를 했기 때문에 부모한테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걸 나름 알았던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모임 책자라던가 성소수자에 대한 자료를 많이 갖다 줬었어요. 그 자료들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일단 커밍아웃을 할 때는 성소수자에 대해 알게 하는 게 우선인 거 같아요.

 

어나더 / 그럼 나미님이 받으신 커밍아웃 방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천히 여러 번에 걸쳐서 하는 거요.

 

나미 / 저는 애가 겪는 걸 같이 옆에서 겪었잖아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했기 때문에 굉장히 수월했어요. 그리고 우리애가 커밍아웃하고 나서 부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애가 어렸을 때 모범적이었고 윤리적이었고 사람의 올바른 도리를 잘 갖춘 아이였기 때문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 성소수자 부모로서 상당히 복 받은 케이스인 것 같아요. 그거를 옆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과정이 당사자한테도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나더 / 자녀분이 얼마 전에 ‘트랜스매스큘린(transmasculine)’ 이라고 정체화를 하신 거 같던데, 그것에 대해서 혹시 얼마나 알고 계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나미 / 그냥 그 어휘가 주는 의미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트랜스매스큘린’하면 페미닌(feminine, 여성스럽다)의 반대말이잖아요. 그래서 그 말뜻도 그렇게 이해해요. 편의상 MTF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우선 그 단어에서 주는 느낌에서 대충 이해하고 있어요.

 

어나더 / 처음에 커밍아웃을 받으셨을 땐 기분이 어떠셨어요?

 

나미 / 기분이라기보다는 많이 울었어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데 이때껏 생각했던 애가 아니잖아요. 그 요인도 있지만 부가적인 것도 많았어요. 아이가 거쳐야 할 일, 학교에서의 시선, 교우관계, 나중에 공부할 때 불이익을 얻지 않을까,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걸림돌이 돼서 포기는 하게 되지 않을까…. 굉장히 복잡한 것들 때문에 그랬죠. 트랜스젠더는 이렇구나, 우리 애는 이렇게 살거구나 라고 지금은 알게 되었지만 울컥울컥 눈물이 났던 거 같아요.

 

어나더 / 처음 커밍아웃을 받았을 때 반응은 어떠셨어요?

 

나미 / 그냥 얘기를 들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 생각해볼게.”애 앞에서 운다던가, 흥분을 한다던가, 뭐 그런 얘긴 안 한 거 같아요. 내가 혼자 생각을 하거나 남편이랑 얘기를 해서 방향 제시는 많이 했죠. 특히 진로 관련해서 그랬죠. 앞으로 몇 년 만 더 참아라.

 

어나더 / 생각보다 좀 차분하신 반응인 거 같아요.

 

나미 / 애도 인정을 해요. 그런 부분은.

 

어나더 / 커밍아웃 이후에 가장 먼저 연락한 분은 누구세요?

 

나미 / 여동생이었어요. 가장 이해를 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동생 둘째 애가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데 장애를 극복하고 잘 살고 있는 부모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겸 편히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나더 / 여동생의 반응은 어땠나요?

 

나미 /“우리 아이가 호르몬 치료를 받고 싶어 해, 남자가 되고 싶어 해.”라고 했더니 “내가 바로 갈게.”하면서 당장 왔어요. 그 때 이런 저런 상황을 듣고 해준 얘기는 처음에 아이가 남자라는 얘기를 듣고 ‘정말 그럴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같은 똑같은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어나더 / 그때 당시에 들은 이야기 몇 개 생각나시는 거 있으세요?

 

나미 / “언니가 너무 애들을 자유롭게 키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 못 하는 생각을 했다, 애를 가졌을 때 태교가 잘못된 거 아니냐. 그리고 과거에 남자 여자를 떠나서 뭘 원하는 게 있을 때에는 그게 자기 성에 맞지 않았어도 원하는 대로 따라줬는데 그런 거에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라고 했고 “좋은 정신과에 가서 치료가 가능하면 해보자.”라고도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아이가 호르몬 치료하고 다 진행되는 걸 알려주고 나서는 별다른 말 없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사나보다’ 하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어나더 / 죄책감이 많으셨을 거 같아요.

 

나미 / 한동안은 그랬어요. ‘그 때는 그랬어야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대표적으로 남녀 역할 구분을 많이 안 시켰다는 거였어요. 첫째 아들한테는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많이 시켰고 둘째한테는 넌 딸이니까 나중에 많이 할 거라고 집안일은 잘 시키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혼돈한 거 아닌가 생각했었죠.

 

 

 

3. 갈등 / 고민

 

어나더 / 자녀분과 그 당시에 직접적인 마찰이 없었던 거 같아요.

 

나미 / 1년 반 동안 거의 없긴 했지만 아예 없진 않았어요. 아이가 호르몬 치료를 받고 어느 날 우울증 치료약을 복용했는데 그걸 저한테 얘기를 안 했어요. 전에 언급 정도는 했어요, 우울증인 거 같다고. 그 때 “이겨내 봐, 정신을 튼튼히 해야 돼.” 라고 한 것 같아요. 약을 복용하고 나서는 몸도 쳐지고 잠도 계속 자고 거의 폐인처럼 몇 달을 살더라고요. 자기 몸에 맞는 약을 찾아야 한다고 두세 번 바꿨는데도 나아지질 않았어요. 두 번째 바꿨을 때 좀 오랜만에 환해 보이고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그게 며칠을 안가고 다시 힘들어 하더라고요. 우울증 환자가 예민해져 있는 걸 부모한테 푼 거 같아요. 사소한 거에 화도 내고, 그런 것 때문에 친구들 만나서 그거에 대해서 얘기하고 울고. 그때 트랜스젠더 부모모임을 갔었는데 그게 애가 뭐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다행이다 싶었어요. 근데 다 이해가 돼요.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지금은 뭐 과보호처럼 잘해주고 있어요. 본인은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같지만요.

 

어나더 /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고 느낀 게 있다면 자녀분과 나미님은 서로 뭔가 숨김없이 다 얘길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됐는지 궁금해요.

 

나미 / 자녀와 부모의 사이가 가까우면 서로 이해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시간이 단축될 거라고 봐요. 주변에서 들으면 갈등이 많고 이해가 안돼서 마음고생하고 그러면 또 생활이 제대로 안 되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더라고요.

 

어나더 / 혹시 성소수자 관련 서적이나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나미 / 책으로는 딱히 없는 거 같지만 그냥 자료로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많이 봤어요. 영화로는 ‘바비를 위한 기도’가 있는데 그건 다 본 건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 편집해놓은 거랑 다른 사람이 쓴 감상문 등을 봤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트랜스젠더 부모모임 어머님들이랑 ‘대니쉬 걸’도 봤네요.

 

어나더 / 종교 때문에 생긴 갈등은 없으세요?

 

나미 / 전 종교가 없어서 괜찮았어요.

 

어나더 / 그럼 혹시 관련 상담을 받아보신 적은 있으세요?

 

나미 / 우리 애가 별의별상담소에서 10회인가 20회 짜리를 두 차례 상담 받아봤고 교내에 있는 상담소에서도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 이후에도 더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는데 더 하진 않더라고요. 한 6개월 이상 꾸준히 상담을 받았어요. 저는 작년 초쯤에 나도 상담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힘들 때마다 그냥 인터넷에 있는 성소수자 관련 자료들을 찾아본다던가 주변 사람들한테 많이 털어놨었어요. 특히 큰 언니한테 많이 했어요. “언니, 우리 애가 이러이러해요. 그래서 지난 1년간 제가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라고 했을 때 우리 언니가 ‘걔는 왜 그러니’ 라던가 ‘그런 일이 어떻게 생겼냐’ 같은 말들은 하나도 안하고 “네가 마음고생이 많았겠다.” 그러면서 “드문드문 그런 애가 있는데 우리 집안에도 있는 거다.” 라고 하시더라고요. “애가 뭐 원하는 게 있으면 다 해줘라.” 그게 참 힘이 많이 났어요. 옆에서 겪지 않은 사람이 같이 이해를 해준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한 명한테도 얘기했어요. 근데 그 분은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부부가 전도사여서 희망적이라고 생각 안하고 그냥 털어놓았는데 “그거는 타고 나는 거야.” 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기독교 쪽에서는 그걸 고친다고 전환치료도 시도하고 감금도 시키고 그런다는데 그분은 “그런 게 고쳐지는 게 아닐 텐데.” 라고 하시더라고요. 평소에 저를 통해서 아이가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그런 똑똑한 아이를 얼마나 큰일에 쓰시려고 하나님이 그러시는지.” 하셨어요. 그게 제 앞에서만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정을 한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살고 있는 곳에 동 대표분 에게도 말씀을 드렸어요. 육십을 넘으신 분인데 언젠가 저한테 자녀분이 아드님이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딸이었을 때의 모습도 보셨는데도요. 그분이 평소에 진실 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흠칫했지만 사실대로 얘기를 했어요. “우리 애가 딸로 태어났는데 본인은 아들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호르몬 치료를 하고 아들로 살아요. 이름도 아들로 살려고 바꿀 준비도 하고 있어요.” 하구요. 제가 동네 분께는 처음 말씀 드리는 건데 했더니 그분이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해요. 그런 애들이 있기도 하죠.” 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걸 보고 성소수자의 행복, 불행이 남의 손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사람의 시선이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아주 복 받은 케이스인 거 같아요.

 

 

 

4. 화해 / 해소

 

어나더 /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게 인생의 행복인줄 아셨다가 그게 깨진 것처럼 생각이 바뀐 다른 일들이 있으신가요?

 

나미 / 그냥 우리가 교육 받은 대로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우리 아이를 거치고 나서는 이가 빠진 상태로 둥그렇게 그냥 살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이가 끼워 맞춰진 느낌이랄까요?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전 똑똑해진 거 같아요. 뭔가 더 완전해진 느낌. 결국 막 안 좋게 얘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어나더 / 혹시 아버님도 같은 경험을 겪으셨는지?

 

나미 / 제가 남편보다 받아들이는 건 한발자국씩 빨랐어요. “우리 애 상태가 이런 거예요.”라고 하면 남편은 금방 수긍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완전히 믿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 생각하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제 얘기에 다 수긍을 해주더라고요. 그 와중에 한 번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성소수자를 막 없애야 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고 사람들이 본인의 생활권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았지만 기독교 세력이 들어온 이후로는 차별이 심해진 것이라는 말을 저랑 밖에서도 했었어요.

 

어나더 / 혹시 지금은 다른 소수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나미 / 이제는 여러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내가 이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많이 했고 또 그 방법이 우리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UN이 인권헌장을 발표한다는 거든가 미국에서 성소수자 관련 제도가 바뀌는 걸 보고 희망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부모모임 인터뷰를 할 때에도 제가 뭐라고 했냐면 우리나라 기독교 사람들 큰일 났다고 했어요. 앞으로 그들이 밀고 가다가 10년 후 20년 후에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소수자 권리가 보장될 때 이제 그들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어나더 / 자녀분의 커밍아웃 이후에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변화가 생기셨나요?

 

나미 / 제가 아이와의 관계는 참 가까운 사이다하고 지냈는데 트랜지션의 과정을 겪으면서 훨씬 더 가까워졌다고 느껴져요. 이제서야 아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것이고 남들과도 이것에 대해 알아야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준비하고 있고 그 이후에 더 친밀한 관계가 될 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성소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느 순간부터 ‘네가 뭘 알아’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성소수자 가정이고 부모인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 때 그게 상처가 되고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자존감을 해친다던 지 내 삶에 방향에 변화를 주지는 않을 거 같아요.

 

 

 

5. 부모모임

 

어나더 / 부모모임에 처음 나오신 게 9월이신데, 어떤 동기로 자녀분과 같이 처음 오시게 되었는지?

 

나미 / 그 때 당시에는 아이가 트랜스젠더라는 건 알았지만 완전히 변화를 줬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쉽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근데 이제 완전히 아이가 남자로 바뀌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충격도 받고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몇 년 만 참으라고 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건지를 알아보고 싶어서 같이 아이랑 오게 됐어요. 먼저 가자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나더 / 와보시니까 어떠셨어요?

 

나미 / 전 제가 적기에 잘 가서 많이 도움을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인 거 같아요. 많은 분들이 거기에 가서 위안도 받고 도움도 많이 됐다고 하시는데 저는 그게 다 이해가 가요. 그분들도 다 이랬겠구나 싶더라고요. 특히 저한테 위안이 많이 됐던 건 보여주신 자료, 현 상황, 그리고 커밍아웃 이후 가족의 반응이 어떤 단계를 밟게 되고 또 그 단계에서 어떤 게 후회가 되는지, 이런 것들이 저에게는 교과서처럼 도움이 됐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은인이 되신 거 같아요. 부모님들이. 제가 다른 부모님들보다도 더 크게 도움을 받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어나더 / 나미님한테는 부모모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치유력이 굉장히 많이 전달이 된 거 같아요.

 

나미 / 네 제가 대표적인 케이스에요.

 

어나더 / 아까 부모모임에서 제공한 자료를 지금 이 인터뷰 하시면서도 말씀 하셨고, 인터뷰하기 전에 자녀분이 두 번째로 부모모임에 방문하셨을 때도 부모모임에서 준 자료가 본인을 정말 달라지게 했다고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나미 / 네 그런데 웃긴 거는요, 트랜스 부모모임에 갔는데 트랜스 로드맵이 있더라고요. “어머 그런 게 있어요?” 하면서 하나를 받아왔어요. 근데 그때 아이가 “엄마 그거 집에 있어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 잘 모르겠어.” 했죠. 집에 왔는데 진짜 있더라고요. 그 몇 달 동안에 막 읽고 넘기고, 읽고 넘기고 해서 이게 뭐가 뭔지 어디 적어놓고 이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얘기를 꺼내라고 그러면 ‘뭐에요, 뭐에요’ 하곤 말을 못하겠어요. 근데 그 자료를 보면 이건 내가 봤던 거라는 건 알거든요. 근데 제일 대표적으로 도움이 됐던 거는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이에요. ‘이렇게 해서 자녀가 성소수자라고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세요.’하는 거를 프린트해서 준 거를 읽어봤어요. 그리고 또 법륜스님? 그분이 성소수자를 상담하면서 이야기 해주는 거를 듣고 ‘아 불교 쪽에서도 인정이 되는구나.’ 싶었어요. 근데 그 분이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와의 구분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그 다음에 특히 이제 그 저기 유럽 쪽에서 굉장히 자유롭잖아요. 그런 거에 대해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런 자료를 보고 굉장히 희망을 많이 가졌던 것 같아요

 

어나더 / 부모모임에 오시고 나서부터 본인이 생각한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에 대해 설정한 기준이 있잖아요. ‘여기까지야, 여기까지’ 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넓어진다고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게 점점 넓어지는 게 느껴지시잖아요. 그럼 어떤 기분이세요?

 

나미 / 그러니깐 애한테 처음 조건을 건 거잖아요. 네가 이런 방향으로 해. 근데 그게 애가 더 행복해지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커밍아웃 했을 때 주위의 시선이라던 지 어려움이라던 지 불이익이라던 지 그런 게 없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확고한 어떤 위치에 있을 때, 그걸 누가 못 흔들 때, 나는 이래요 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그 때 뽀미님 따님이 결정적인 답변을 해줬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사람을 세모로 봤을 때, 성공하고 직업을 갖고 행복하고 뭐 이런 것 제일 밑에 있는 게 정체성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게 맨 아래 기반이기 때문에 그거 없이는 위가 다 달성이 되지 못한다는 거잖아요. 쌓아도 허물어지는 거니까요. 자기가 정체성을 찾아서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살 때에서야 위에 쌓아지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분이 아주 대단한 분이에요, 젊은 분인데. 그래서 내가 뽀미님한테 어쩜 이렇게 따님을 잘 키우셨냐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답이 그거예요. 우리 큰언니가 이야기 중에 “이제는 아이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줘.” 라고 했어요. 그게 뭐에요.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라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결정권은 자기 손에 있어야 하는 거죠. “네가 결정을 해서 여차 여차 하면 그냥 우리는 그대로 따르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해줬어요.

 

어나더 / 그러면 부모모임 첫 방문을 자녀분이랑 같이 하셨는데 그 이후로 자녀분이 어떻게 변화 하셨어요?

 

나미 / 부모모임 갔다 온 후로요? 걔는 부모를 이해시켜야 된다는 게 컸던 거 같아요. 그리고 부모모임에서 다른 부모들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배우라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고요. 또 자기 세계를 부모도 같이 갔으면 하는 그런 희망이었을 것이라고 봐요 그리고 제가 부모모임에 갔다 온다던 지 인터뷰를 한다던 지 하면 굉장히 좋아해요. 그리고 “너에 대해서 남자친구 이야기라든지 네가 우울증 약을 먹는 이야기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 내가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없대요. 있는 사실대로,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다 이야기 하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 본인도 부모모임에서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그것보다 우선적인 게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 지금 이제 손을 놓고 가까이, 학교에 있는 성소수자 모임만 꼭 해야 할 만큼 하면서 있는 거 같아요.

 

어나더 / 요즘엔 본인에게 충실한 그런 시간이 있는 건가요?

 

나미 / 요새는 공부만 해요. 과제나 그런 게 너무 벅차서 잠을 못 자요. 그게 자기가 당장 해야 되는 과제니까요. 열심히 하는데 그게 한편으로는 안도도 되면서 얼마나 쟤가 이를 악물었나 싶어요. 자기도 책임감 이런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안쓰럽죠.

 

 

 

6. 미래

 

어나더 / 그럼 이제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현재에 대한 이야기도 했잖아요. 이제 미래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질문이 좀 광범위 하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나미 / 저는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 할 때는 항상 내가 이전에 어땠나 이제 그거를 돌아보게 돼요. 하늘님하고 지인님한테도 그랬지만 내가 우리 아이 아니었으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우리 애가 그렇다는 걸 떠나서 이걸 받아들이고 이렇게 됐을 때 뭐가 제일 도움이 됐나 생각하면 ‘성소수자를 자녀로 둔 부모를 위한 가이드북’ 이라든지 영화라든 지 그게 굉장히. 사람들이 한번쯤 그런 거를 보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까 싶어요.

 

어나더 / 그러니까 대중교육 같은 게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미 / 네

 

어나더 / 저도 되게 개인적으로 참 많이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가 다양성 교육이 너무 부족하다는 걸 느끼거든요. 항상 가르치는 것만 가르치고 점점 더 편협해지는 걸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요. 교과서에서도 뭔가 성소수자 항목이 지워진다는 걸 보면요.

 

나미 / 근데 우리 아이가 처음에 자기가 그런 걸 알고요 고등학교 때 좀 젊고 뜻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국어 선생님이셨던 거 같아요. 선생님한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나 봐요. 선생님 답변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고 그러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도 그 중에 제일 말이 통할 거 같아서 선생님을 만났던 건데 그래서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제 친구 중에 초등학교 선생하다가 교감하다가 다른 게 해보고 싶어서 일찍 퇴직을 한 그런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아이가 이래.”하고. 그랬더니 “어휴, 그래 타고나는 거야.” 그러면서 그 고등학교 때 지금 생각해보면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같았던 남자 같은 애가 있었는데 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근데 그 애가 제 친구랑 같이 서울 교대를 같이 나와서 선생님을 했는데 그 애는 교장이 됐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무슨 학교 모임이나 이런 큰 일 있을 때마다 만나곤 했대요. “걔가 교장이 된 학교 애들은 굉장히 복 받은 애들이야.” 그랬는데 생각해보면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사는데 그 에너지를 다 학교에 쏟는 거잖아요. “너네 애도 이런 이런 롤모델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그렇게 살면 돼.”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나더 / 성소수자 자녀를 되게 지지하고 많이 챙겨주시고 있잖아요. 그래도 요즘 여전히 걱정되는 게 있을 거 같아요.

 

나미 / 있죠. 아직도 어떨 때는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아요. 근데 그냥 제가 아까도 이야기 한 거 같은데, 왜 나의 행복과 불행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많이 좌우되는지 그냥 그 걱정이 큰데, 지금 다행히 자기네 과 사람들이나 동아리 사람들이 이해를 해주고 같이 지내는 애들이 다 받아들여 주는 거 같아요. 그리고 교수님도 깜짝 놀라시기는 하지만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애가 지금 조금 부족한 게 뭐냐면 ‘항상 네가 참아라’ 라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네가 ‘저 사람은 몰라서 그래,’ 그러고 넘겨줘라,” 이런 걸 발끈해요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해요. 그래서 그게 어느 정도의 자기 수련이라면 수련일까요, 요령이라면 요령일까, 그런 걸 좀 편히 받아들이는 게 됐으면 좋겠어요. 주위 시선이나 불이익 이런 것 때문에 나는 끝났어 하면서 그만두거나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꼭 성소수자 아니래도 헤쳐 나가야 되고 뭐 이겨내고 참아야 될 일은 많거든요.

 

어나더 / 이제 인터뷰 질문 제가 준비한 건 다 끝났는데 혹시 더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

 

나미 / 지금 행성인이나 조각보도 그렇고 신나는 센터도 그렇고, 이제 뭐 굉장히 번성하고 호응을 많이 받으면서 잘 될 것 같아요. 희망을 갖고요. 제가 어제 병원에 있었고 그제도 병원에 있었고 그 다음 주에 계속 병원 다닐 일이 있어서 그냥 이런 바깥에 모이고 이런 일에는 제가 조금 안 갈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주말에 제가 농사를 짓거든요. 주말에는 서울에 없어요. 아이 때문에 그냥 그거 다 포기하고 모임에라도 가서 봤던 건데 주말에 하는 일들은 다 못하고 주중에도 제가 제약이 많아서 그냥 뭐 저 나름대로 해야 할 것 같아요. 트랜스젠더는 자기가 어 이렇구나 하고 자각한 다음에 차후에 진행돼야 하는 과정이 많아요. 그래서 트랜스젠더 부모님들은 일상에 나서기가 쉽지 않아요. 애가 다 자리 잡아서 신체적인 게 해결이 되면 정신적으로는 뭐 좀 편해질 순 있는데 그 전에는 진짜 내 코가 석자더라고요. 수술이 잘 안되면 10년도 더 수술에 매달려요 그래서 제가 한번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인 네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이런 말을 하면 아이가 “똑같이 해야지 왜 더하냐.” 하더라고요. 수술이 10년째 안되고 아직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신 분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어머니 자녀분과 생각이 같다고. “왜 그렇게 제대로 인정받는 자리에 서야만 그게 제대로 산다고 말할 수 있나요.”아 내가 아차 실수했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제 사례가, 이런 일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이랬구나,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같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서 과정이 더 짧아지고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인터뷰 했습니다.

 

어나더 / 너무 수고 많으셨고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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